영생을 말씀하시다._요17:1-5_1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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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을 말씀하시다._요17:1-5_11월 29일

성문Shalom 0 6014 0

오늘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억하며 새기는 대림절 첫째 주일입니다.

2020년 전에 이 땅에 내려오셔서 즉 성육신하셔서 우리와 함께하신 날이 성탄절입니다.

 

-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3대 사역은

1. 하늘나라를 선포하시고

2. 말씀을 가르치셨고

3. 온갖 질병과 약한 자를 치유하셨습니다.

 

-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과업은

1.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류구속의 길을 여셨습니다.

2. 부활하심으로 영생의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구속과 영생이라는 큰 선물을 은혜로 받아서 구원을 얻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이번 주에 읽으실 말씀에 들어 있습니다. 이번 주에 읽으실 말씀은 17장부터 마지막 장인 21장까지의 말씀입니다. 다음주에는 4복음서에 관한 전체적인 말씀을 나누고 1년차 후반기 성경상고 행진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생에 관하여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죽음과 공포가 상존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두려움도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남에게 피해를 줄까, 나의 모든 동선이 노출되서 위험에 빠질까 걱정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때에 정말 죽음과 삶에 관하여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죽으면 끝인데 라는 생각을 하는 분들도 있고 죽음 이후 이루어지는 그 무엇인가가 있을 텐데 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으면 천국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생명에 관하여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아버님과 어머님의 기억이 내 가슴속에 새겨져 있다면 살아 있는 것일까요? 끝이 난 것일까요? 부모님의 유언을 듣고 지금도 행하고 있다면 그리고 먼저 죽은 자식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자식은 끝이 난 것입니까? 아니면 살아 있는 것입니까?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단지 육체적인 호흡과 몸의 활동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병상에서 호흡기를 꽂고 1년이고 2년을 사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일까요?

단순히 시간적으로 오래 호흡이 붙어 있는 것을 영생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래 영원히 사는 것은 오히려 저주일 수 있고 고통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영생은 풍성한 삶과 활력있는 생명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몸의 형태가 다 망가진 상태로 영생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는 영생에 대한 분명한 성경적인 명제와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능력있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포인트는 영생은 죽은 뒤에, 천국에 가서나 소유하는 미래적인 삶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5:24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 로 옮겼느니라 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영생을 얻었고란 말입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얻었고라는 단어는 시제상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믿는 사람은 이미 현재적으로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즉 영생은 우리의 육신의 숨이 끊어진 후에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누리는 삶이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영생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3절에 나옵니다.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첫째로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하여 알 수 있는 대림절에 사용하는 단어는 두 가지입니다.

임마누엘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예수 :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신다 라는 단어입니다.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 심이라 하니라

 

즉 임마누엘이란 언어 속에는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창조하셔서 선하신 관계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인간에게 주신 최대의 능력인 자유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하나님 됨을 추구한 것입니다. 이후 파괴와 폭력과 살인이 찾아와서 인간의 역사는 스스로 자정할 수 없는 고난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결단을 내리셨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심으로 십자가라는 속죄의 상징을 통해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믿는 것이 바로 영생이고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했다는 것은 세계관과 가치관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인간중심으로, 인간본위로, 마치 자신이 신인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던 사람들이 깨닫는 것입니다.

~ 인간은 죄인이구나, 내가 바로 죄인이었구나.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인간의 마음, 즉 인간의 지성, 인간의 의지 인간의 감정 모두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돌이켜야 하는구나, 깨닫는 사건이 바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영생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회개하며 돌이키며 사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처럼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살기가 성성했던 사람이 변하는 것이지요. 날마다 손을 씻고 발을 씻듯이 내 마음과 영혼의 죄악의 때를 자주 돌아보고 용서를 구하는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 일반적으로 명령형의 사람들은 남에게 상처를 많이 줍니다. 그리고 자신이 멀쩡합니다. 자신은 뒤끝이 없다나요. 가정에서도 남편이 일방적이고 자기주장이 강한 집은 보통 아내와 자식들은 눌려 살고 한이 많아서 얼굴이 펴질 날이 없습니다. 아내가 센 가정이 있습니다. 남편이 겉돌고 자식들은 서서히 정을 떼고 어느 시점이 되면 상대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는 흔히 장례식장에서 잘 나타납니다. 자식들의 좋은 추억이 지워졌어요. 눈물이 없어요. 일찌감치 애틋함이 감정의 지우개로 지워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한 사람들은 압니다.

내가 잘못했구나,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내가 죄인 중에 괴수로구나, 나는 뒤끝이 없어서 괜찮다고, 그런 소리하지 말고. 자식에게도 주변사람에게도 죄를 지어서 죄송하다고, 일방적이어서 미안하다고 자신을 돌아보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지? 하나님의 섭리는 무엇인지?

성경말씀을 자꾸 읽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겸허하게 구하는 것입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했다는 것은 내가 가정에서 신됨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했다는 것은 내가 교회에서, 주변에서 신됨을 내려놓았다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이끌어 가주세요. 이제 주님께서 우리 가정을 인도해주세요. 이제 주님께서 우리 교회를 주관하셔서 이끌어 가주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비로소 사람이 보이고 울고 있는 자식이 보이고 아파하는 사람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그 자리에 인간의 신됨이 사라지고 위로와 사랑과 참 평안이 깃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생을 얻고 누리는 삶인 것입니다. 영생은 목숨이 긴 것이 영생이 아니고 평안과 사랑과 참 안식이 이어지는 것이 영생인 것입니다.

 

큰 둘째로 영생은 어떻게 이어져 영원히 이르게 될까요?

오늘 예수님 말씀에 아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여기서 안다는 단어가 참 중요합니다.

안다는 헬라어로 기노스코인데 체험적인 지식을 말합니다. 체험적이란 말씀은 체득화 된 것 즉 몸에 익숙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안다는 것은 단순히 듣고 읽고 하는 것이 아니라 연습하고 또 연습하여 몸에 배고 삶에 배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몸에 체득화 될까요? 바로 순종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이 바로 알아가는 것이고 아는 것입니다. 순종을 하면 알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얼마나 힘드셨는지,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창과 못에 찔려 돌아가시기까지 순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한다는 것은 이 험하고 악한 세상을 살면서 힘든 일이고 심지어는 불가능하게 보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힘들게 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내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 악한 의도를 가지고 다가오는 사람에게 뺨을 돌려 대는 것은 바보 같은 모습이고 무시당할 처신이기도 합니다. 자꾸 그렇게 반복하면 사람을 우습게보거든요. 그때 나의 마음은 자존감까지 바닥을 치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5: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 도 돌려 대며

18: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 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18: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 라

이러한 말씀, 순종은 죽기만큼 힘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따르기로 순종을 결심하면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면

긍휼한 마음을 주십니다. 불쌍한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저 정도밖에 안되는데 자신은 얼마나 힘들까 이 긍휼의 마음이 나의 상처와 한을 씻어가 버립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님은 이런 나를 위해 구원하시려고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 십자가상에서 얼마나 우셨을까?

 

하늘의 위로와 은총을 얻습니다.

임마누엘 하나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내 옆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잘했다고 나의 사랑하는 딸아, 내 아들아 내가 너를 안고 걷노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얼마 전 일입니다. 결혼한 딸아이가 아기를 낳고 키우면서 하루 종일 애를 안고 어르고 밤에 몇 번이고 깨서 젖을 먹이면서 아기 키우는 일이 보통일이 아닌 것을 깨달았나 봅니다. 엄마에게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엄마가 우리를 키울 때 이렇게 힘드셨지요. 엄마 감사해요.

 

- 순종, 해보면 압니다. 하나님의 아버지의 마음을.

- 말씀 순종해보면 압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얼마나 고통스러우셨는지를. 우리는 그렇게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어떻게 잊혀 질 수 있고 지워질 수 있을까요. 영원히 영원히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우리에게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생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이 땅에서 영생을 부분적으로 누리고 저 하늘나라에서 온전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

21: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21: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 라

 

같이 찬양하시겠습니다.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내 주 되신 주 앞에 나가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 (* 2)

 

주 사랑 거친 풍랑에도 깊은 바다처럼 나를 잠잠케 해

주 사랑 내 영혼의 반석 그 사랑 위에 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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