쉴 새없는 고통속에 위로자를 붙들다 (마가복음 14장 32-4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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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 새없는 고통속에 위로자를 붙들다 (마가복음 14장 32-4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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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 새없는 고통속에 위로자를 붙들다

쉴 새없는 고통속에 위로자를 붙들다

2017년 9월 17일

본문 : 마가복음 14장 32-42절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을 보면 참으로 다양합니다

물질문제부터 시작해서 상호관계 때문에 그리고 자연재해 때문에 큰 고통과 눈물을 당하며 사는 것을 보게 됩니다 더욱이 고통이 올때 한 가지만 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모습으로 파도처럼 찾아오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또 오랜기간 계속되는 유지되는 경우도 많

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는 것이 고통이라고들 합니다 요즘은 사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분들이 많이 있으실 것입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요셉이라는 인물이 나오면 눈여겨 다시 읽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의 고난은 오래 계속되는 고난이었거든요

물론 다윗도 다양한 고난과 아픔을 경험한 사람이지만 그래도 블레셋의 골리앗 장군을 죽인 후에 백성들에게 인정도 받고 높임도 받은 시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의 앞길을 도저히 예측할수 없을 정도로 점점 더 깊어가는 고난을 당한 사람입니다

요셉은 그의 형제들의 시기를 받아 죽을 뻔 하다가 에집트의 상인등에게 팔려갑니다 전혀 생소한 곳에 어린 나이에 떨어집니다 그 곳에서 그는 종으로 살아갑니다 그곳에서 어느날 그는 에집트의 시위대장의 종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거기서 인정을 받아 모든 것을 관

리하는 가정총무의 임무를 맡게 됩니다

 

그러나 또 여주인의 모함으로 이제는 평생 감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죽어야 나오는 그런 감옥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기가 막힌 운명이고 연속되는 고난의 인생인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그 속에서 극적으로 빠져 나와 에집트의 총리가 되는데 성경에 보면 요셉이 총리가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의미 있는 말씀이 자주 나옵니다

 

먼저 창 39: 3절에 보면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또 창 39:23절에 보면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이 말씀은 바꾸어 말하면 고난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있는데 요셉을 형통케 하신 것입니다 형통이란 단어의 히브리어 원어는 짜라흐 인데 돌진하다 돌파하다 건너가게 하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누가 요셉을 돌진하게 하신 것입니까?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이 말씀을 요셉의 입장에서 보면 이렇습니다

요셉은 눈물과 고난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위로로 삼고 한 발자국 걸어나갔다는 말씀이 됩니다

눈물의 자리.. 고통의 자리.. 억장이 무너지는 그 현장에서 요셉은 하나님을 붙잡고 주님을 의지하고 걸어서 앞으로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노예로 전락한 그 처참한 자리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믿었습니다

사람은 나를 버려도, 형제는 나를 버렸어도 하나님은 나를 보호하실 거야

낙심치 않고 또 어려운 순간을 이겨낸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을 위로 삼음으로 다시 일할 수 있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다시 추스릴수 있고 하나님을 소망함으로 추락한 그 자리에서 다시 성실하게 삶을 꾸리며 앞으로 전진해 나갈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쉴 새 없이 다가오는 고난의 현장에서 요셉이 경험한 하나님의 위로의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잘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섭리를 결국 보게 된 것입니다

오늘도 요셉에게 임하셨던 하나님의 위로가 우리 모두의 버겁고 힘든 삶에 임하시길 축원드립니다

 

오늘 본문은 요셉보다 더 심한 고통을 경험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의 길의 고통을 익히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걸어가시고자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셨습다 그리고 제자들도 다 버리고 도망하게 될 것도 이미 아셨습니다

사람이 가장 힘든 것은 고난을 알고 당하는 것입니다

모르고 당하면 그래도 낫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배려는 앞일을 모르게 하신 것입니다

만일 사람이 몇 년 몇일 언제 사고를 당하고 언제 위험한 일이 있고 다 안다면 아마 지금이 순간부터 살지 못하고 미리 염려와 걱정으로 가슴이 터질 것입니다 또 고통의 시간과 그 정도를 미리 안다면 삶을 체념하고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앞길을 미리 알지 않게 배려하셨고 우리의 고통도 확고하게 정해있지 않기에 알려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 알고 그 고난의 길을 걸으신 것입니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극심한 고난의 현장속으로 알고도 온전히 그 길을 걸으신 것입니다 그 가운데 인간의 극심한 심적고통도 동반됩니다

 

그래서 34절에 보면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

예수님의 이 고백은 바로 우리의 고민이고 우리의 아픔이고 우리의 눈물입니다 고난이 오면 고민이 많아집니다 그리고 무거운 짐들이 차곡차곡 우리의 머리위에 쌓아져 갑니다 그래서 죽을 지경이 됩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을 지경이 된 것입니다

 

이때 쉴새 없이 다가오는 고난의 예견된 장면들을 이겨내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옵니다 이 모습은 바로 2017년 두려움과 혼란이 공존하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를 위로로 삼고 이 고통의 시기를 걸어가셨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은 함께하는 제자들을 위로로 삼으셨다는 사실입니다

33절에 보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라고 말씀이 나옵니다

주변의 친구들을 위로로 삼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통을 이기는 방법 중의 하나는 친구들과 함께 함인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가셨을까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실 수밖에 없는 그 현장, 약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는 그 자리에 왜 데리고 가셨을까요?

물론 제자들을 가르치시고자 하는 의도도 계셨겠지만 예수님은 육신이셨기 때문에 이런 고통을 당하시면서 외로움의 상황, 고독한 상황, 그리고 고통스런 상황을 직면하시면서 그들을 통해 위로받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친구들과 함께 그 고난의 시간을 함께 계시고 싶었던 것입니다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도 고난을 만나야 진정한 친구들을 우리는 알아본다. 라는 말합니다

유명한 과학자였던 퀴리 부인은 역경에 처할 때 우리들은 진정한 친구들의 숫자를 세어 볼 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의 시간에 힘든 시간에는 친구가 필요한 것입니다

곁에 함께 마음 써 줄, 함께 같이 있어줄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세계 2차 대전때 미국 같은 마을에 살던 친구 두 사람이 전쟁에 징집되어 같이 훈련을 받고 공교롭게 같은 부대에 배치되어 같은 전선에서 싸우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도 작전 중에 친구 하나가 참호를 나갔다가 길을 잃었어요. 그리고 포탄이 나르기 때문에 자기 참호로 돌아오지 못한 채 고립

되어 있었습니다. 저쪽에서 비병소리가 여러곳에서 들립니다

그러자 친구가 막 포탄이 날아오는데 나가려고 하는 거예요.

분대장이 막았습니다. 지금 나가면 너도 위험해 진다.

그러나 분대장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쏠린 틈새를 이용해서 그는 재빨리 참호를 나와서 친구가 고립된 그곳을 향해 포복해 계속 기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고립된 친구에게 접근해서 그 친구를 붙들고 들쳐 업고 그는 다시 참호로 돌아옵니다. 파편이 튀는 조각 속에 그도 심한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면서 친구를 데리고 간신히 참호로 데리고 왔을 때 이미 친구는 숨을 거둔 후였습니다.

분대장은 야단을 칩니다. 이런 바보같으니라고.. 이 네 친구는 이미 죽었다. 그리고 너도 죽어가고 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냐? 이때 그 죽은 친구를 들쳐 업고 왔던 친구는 분대장을 바라보며 이런 말을 남깁니다

 

“분대장님은 친구는 이미 죽었고 저도 부상을 입었으니 제가 도우러 나간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말씀하시지만, 분대장님은 제가 친구를 죽기 직전에 만났을 때 제 친구의 얘기를 듣지 못하셨지요? 네 친구가 뭐라고 그랬나? 내 친구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짐, 나는 네가 올 줄 알았어.

짐, 나는 네가 올 줄 알았어.' 그게 친구예요.

이런 사람들이 진정으로 이것이 함께 하는 사람들입니다

친구는 고통의 순간에 더불어 함께 있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위로를 찾으신 것입니다

물론 이들은 깨어 있지 못하고 자고 있었지만 이들과 대화를 하셨고 이들에게 요청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그 장소에 있었던 것입니다

 

고난의 시간에는 친구들을 바라보십시오 그들과 함께 시간을 만드십시오 친구가 없으십니까? 그럼 먼저 그런 친구가 되시기 바랍니다

 

크리스챤 카운슬러요, 의사였던 스위스의 폰 트루니에니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배우자와 더불어 마음이 통할 수가 있다면 그리고 당신의 주위에 마음이 통할 수 있는 몇 명의 친구, 내가 무슨 얘기를 해도 나를 비판하지 않고 내 얘기를 들어 줄 수 있는 몇 명의 친구만 있을 수 있다면 당신의 인생의 장에서 아무리 폭풍우가 요란해도 당신은 그 폭풍우를 뚫고 나

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인생은 홀로 걷기에는 홀로 가기에는 너무 고독한 인생입니다. 여러분 주변에 좋은 친구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미 주님은 신앙의 친구들을 주셨습니다 바로 성문교회 식구들입니다 서로 친구의 마음을 가진다면 그럼 우리의 삶은 고난은 수월하

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친구들을 주시길 기도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고난의 그 현장속에서 하나님을 위로로 삼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사람의 위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제자들 특히 가장 아끼고, 사랑하며, 같이 있었던 제자들도 같이 그 고통을 나누지 못하는 단계까지 왔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위로의 한계입니다

이것을 깨달으면 사람에 대한 원망과 미움은 조금식 사그러 드실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위로가 있어야합니다

그래야 극복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36절에 기도하십니다 .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그렇습니다

 

여러분! 자세히 보십시오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하시는데 아버지라고 하십니다 아빠.. 아버지...아빠처럼 가깝게.. 아버지처럼 든든하게..아버지처럼 포근하게...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하십니다 그 앞에 엎드리십니다 그곳에서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비젼 칼리지의 학장인 제임스 휴스톤은 기도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우정이라고 정의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우정을 드러내는 순간...

하나님을 나의 친구로 삼고 그리고 그 분 앞에 내 마음을 쏟아 놓고 있는 장면이 바로 오늘 본문의 모습입니다

그 분은 고독하셨습니다. 외로우셨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부를 수 있는 아버지가 계셨습니다.

 

요한 복음 16장 32절에 보시면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성도 여러분! 주님의 외로움과 고독이 느껴지십니까?

예수늠 주변 사람들은 다 떠났습니다 혼자 이제 그 길을 걸어가시게 된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제자들과 같이 다니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혼자 고난의 길을 걸어가시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고백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32절 후반절에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할렐루야.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성도 여러분! 종국에는 친구들이 따라오지 못하는 길이 있습니다.

부부도 함께 할 수 없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길입니다.

물론 예외적으로 사고가 나서 같이 가는 경우가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죽음의 다리를 우리는 홀로 건너가 야 합니다.

사랑했던 친구도 함께 갈 수 없는 고독한 그 길을 건너갈 때, 그때도 함께 할 수 있는 분, 그때도 내가 부를 수 있는 하나님, 부를 수 있는 아버지가 계시다면 우리는 고독하지 않을 것입니다 고통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인생살이속에서 아버지로 나를 위로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아버지!!하며 부르신 적이 있으십니까? 하나님의 위로를 깊이 받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버지 하나님의 깊은 위로는 능히 고난을 견디게 하고 고난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42절에 기도를 하시며 아버지 하나님의 위로를 깊이 받은 후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능히 눈물을 거두고 다시 일어나게 하고 다시 전진해 걸어가게 하십니다

 

어느 목사님의 교회에 일입니다 한 여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 딸이 4살이었는데 얼마나 똑똑하고 예뻤는지 모른답니다 기도도 깜찍하게 잘 하고 ... 그런데 어느 날 트럭이 후진하다가 그 아이를 보지 못하고 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죽었습니다 얼마나 미치도록 괴로웠겠습니까?

밤에 갑자기 생각나면 괴로워 하다가 전화를 합니다. 그런데 무라고 위로할 말이 없더랍니다. 인간의 무슨 말이 위로가 되겠습니까?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이 목사님에게 말씀만이 위로가 됨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어린 아들을 병으로 잃은 말씀을 나누고 다윗이 병 중에 있던 아이를 위해 울며 기도하다가 오히려 죽고 나니까 평정을 찾았다 ...

왜 그런 줄 아느냐 ... 이제 다윗이 그 아이에게로 갈 수 있지, 아무리 애써도 그 아이가 되돌아 올 수는 없다 ... 그러니 천국을 소망하면서 의연하게 살아야 되지 않겠나 ... 그 후 그 집사님이 마음의 안정을 조금식 찾기 시작했답니다.

그러다가 얼마 후에 간증하더랍니다 하나님이 더 위로하시면서 꿈에 딸 아이가 예수님 품 속에 안긴 것을 보여주시더랍니다 그래서 이제 울지 않겠노라고 말하더랍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고난의 연속입니다 그리고 장기간의 고난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속에서 쉴새없이 다가오는 고난의 파도속에서, 죽을 지경의 번민속에서 하나님의 위로와 하나님이 보내신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의 위로를 받으시길 축원드립니다

이런 위로를 깊이 경험하면 예수님처럼 그렇게 말할수 있습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험난함이 삶의 거름이 되어

 

기쁨이라는 것은 언제나 잠시뿐, 돌아서고 나면

험난한 구비가 다시 펼쳐져 있는 이 인생의 길.

 

삶이 막막함으로 다가와 주체할 수 없이 울적할 때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 구석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자신의 존재가 한낱 가랑잎처럼 힘없이 팔랑걸리 때

그러나 그런 때일수록 나는 더욱 하나님을 소망한다.

삶의 험난함이 내 삶의 거름이 되어

화사한 꽃밭을 일구어낼 수 있기를.

나중에 알찬 열매만 맺을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꽃이 아니라고 슬퍼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 시간 찬송을 부르시면서 주님을 의지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280장

1.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외면하시면 나 어디가리까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흘려 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2. 전부터 계신 주께서 영죽을 죄인을 보혈로 구해주시니 그 사랑 한없네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흘려 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3. 나 예수 의지함으로 큰 권능받아서 주님께 구한 모든 것 늘 얻겠습니다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흘려 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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