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 따르기 5. 다르게 해석하며 살기_고후6:1-10_2월13일
비전 따르기 – 5. 다르게 해석하며 살기
본문: 고린도후서 6: 1-10절
사람들마다 세계관이 틀리고 가치관이 다르고 경험관이 인생의 연수만큼 다르게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모두는 다 자기의 입장에서, 자기가 가진 관점에서만 모든 것을 헤아려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른 관점에서 다르게 보기는 정말 인생의 큰 과제이고 어려운 삶의 방식입니다.
요새 오은영박사의 아이들 심리를 헤아리는 TV프로그램, 금쪽같은 내새끼등의 상담장면을 보면 대부분의 부모는 자녀들의 말과 행동을 잘못해석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자라면서 일찍부터 부모와의 관계에 담을 쌓고 사는구나를 깨닫게 됩니다.
아이의 입장에서 헤아려 본다는 것은 다르게 해석한다는 것이고 다르게 해석한다는 것은 자리가 이동이 되어야 가질 수 있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아이의 상황에서 아이를 바라보고 엄마의 자리에서 엄마를 바라보고 아버지의 입장에서 아버지를 해석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특히 자녀들은 아버지에 대한 편견이 많습니다. 혼난 기억, 맞은 생각, 술만 드시는 모습등은 자녀로서 받아들이기 힘든 모습이지요 .....
그런데 아버지를 다르게 바라보기가 가능합니다. 하나는 커서 아버지가 되어야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작은 시 한편으로도 다르게 아버지를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영상을 하나볼텐데 동치미라는 프로그램에서 오미희라는 분이 아버지의 눈물이라는 시를 낭송하는 장면입니다.
저는 이 영상을 보면서 생각의 한 켠에 묻어두었던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모든 추억을 끄집어 내서 다시 해석하며 가슴 깊이 울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든 나름대로의 사건이나 사물을 해석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한 가지 사건이나 사물을 동서남북의 여러방향에서 해석할 수도 있고 겉으로 드러난 표면을 보며 이야기할 수도 있고 그 속을 헤아리며 내면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관점으로 다양하게 다룰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관점에서 다르게 해석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역사속으로 들어가서 스토리 텔링을 하는 것, 한 아이의 내면으로 들어가서 해석을 하는 모습, 다른 사람의 입장을 헤아려 보는 배려등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고 삶의 현명함이며 고귀하며 가치로운 삶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관점을 넘어서서 다르게 해석하며 사는 모습의 장점이 있습니다.
1) 일희일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냄비근성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금방 뜨거워졌다고 갑자기 차가워지는 고통스러워지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입니다.
2) 배척하지 않고 품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공격과 비난이 아니라 생각가 마음을 넓히는 기회로 삼는 것이지요
3) 현명하고 지혜로운 삶의 흔적이 남아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주변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차원의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늘의 차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눈으로 사람과 환경을 다른 차원으로 해석하는 현명함과 지혜를 축복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사도바울은 그러한 차원을 누린 사람이고 오늘 본문은 그러한 삶의 해석을 가르치는 장면이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는 그리스 중남부에 위치한 도시인데 고린도 전후서는 그곳에 거주하는 교인들에게 보내는 서신입니다.
제3차 선교 여행 중에 지금의 터키지역에 있는 에베소에서 2년 이상을 보내면서 그 끝 무렵에 기록된 것이
오늘날 “고린도전서”,“고린도후서”로 알려진 편지서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 만나기 전과 예수님을 만나 후의 모습이 완전히 다르게 됩니다.
- 예수님 만나기 전에는
1) 최고의 지성을 추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에 최고의 학자인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습니다.
2) 세상의 권세를 붙잡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인중에 지도자급 바리새인이었고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능력의 사람이었습니다.
3) 열심이 남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에 벗어낫다고 판단하고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앞장서 다니던 열정이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4) 성품적으로는 적극적인 나머지 혈기가 넘치는 사람이었고 더 나아가서 살기가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스데반 집사가 순교할 때에 증인으로 서고 그리스도인들을 감옥에 넣기 위해 다메섹으로까지 올라가는 살기등등한
사람이었습니다.
-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후 그는 달라졌습니다.
1)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고백하고 세상의 많은 학문은 배설물같이 여겼습니다.
2) 세상의 권세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긍지를 가졌습니다.
3) 열심이 전에는 자기 의를 위한 열심이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을 향한 열심히 바뀌었습니다.
4) 성품적으로도 혈기가 넘치는 사람에서 사랑이 넘치는 사람으로, 혈기가 가득한 사람에서 평화의 사도로 바뀌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는 모든 것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고 모든 것을 해석하는
방식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세계관, 자신의 가치관 자신의 경험관이라는 차원을 뛰어넘어서 하나님의 말씀의 관점,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의 관범에서 온 세상을 해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건, 환경, 그리고 사람의 모든 일들을 사도바울은 있는 그대로 해석하지 않게 되었고 자기 생각 그대로 판단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의 인생을 차원을 높게 만들었고 축복된 인생으로 변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환경과 사건을 그리고 사람을 다르게 해석하는 신앙의 방식, 그리고 지혜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는 모든 고난과 어려움은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때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고후6: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고후6:5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고후6: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그런 말이 있지요 인간의 실패는 하나님의 역사의 시작이라고 ....
인간의 모든 눈물과 아픔은 개인으로 볼 때는 견딜수 없는 절망의 순간이고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의 순간이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시작하시는 순간이 되시는 것입니다.
-홍해 바다앞에 멈추어서 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찾아온 고통과 두려움은 어두움 그 자체였습니다.
뒤에서는 에굽의 특수부대원들이 달려 오고 있었고 앞으로는 바다가 가로막혀 있었으니 인간적으로 볼 때 죽을 일만 남은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일하셨습니다. 홍해 바다를 갈라지게 만드신 것입니다.
-신약에 보면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동이 났습니다. 혼인잔치는 흥이 깨지고 혼례자는 비난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일하셨습니다. 돌항아리 여섯에 물을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도 최상품의 품질을 가진 포도주로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에 얼마나 많은 고난과 박해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심지어는 루스드라에서는 돌에 맞아 죽은 줄 알고 성 밖으로 내던져지는 참혹한 순간을 맞이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회복이 되자 마자 바로 더베로 내려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고난을 다르게 해석하였습니다.
자신의 비참함을 다르게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장하는 순간으로 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플 때 병들 때 상처 받았을 때 그리고 괴로울 때 우리는 세상의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나의 처지로 내 가치관으로 보지 않습니다.
말씀의 힘으로, 하나님의 기적과 능력으로 해석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고후12장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육체의 가시를 없애달라고 간절히 3번 기도하였는데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고후12: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금 여러 가지 환경이, 모든 경제 지표가, 사회적 여건이 극심한 불안과 혼돈과 고통속에 잠겨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삶의 무기를 내 생각, 내 가치관으로 삼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삼으시길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기회로 만들어 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둘째로 우리 자신의 평가를 인간적으로 초라하고 무능한 자로 보지 마시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써 존귀한 자로 해석하시기 바랍니다.
고후6: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고후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가난하면 어떻습니까? 고통이 많으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뚫고 나가며 하나님의 기적으로 모든 것을 누릴 수 있기에 우리는 넉넉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백합니다.
롬8: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느니라
롬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할렐루야 !
그렇습니다. 우리는 참된 자입니다. 우리는 유명한 자입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자이고 우리는 기뻐하는 자이고 우리는 부요한 자들이고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진 자들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영광이 임하시면 우리는 온 세상의 존귀한 자가 되고 천사도 흠모하는 부요한 자가 될 것입니다.
그럼으로 기억하십시오 바로 지금이 은혜의 때요 구원의 날인 것을 ...
고후6: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우리가 무너진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드라마를 쓰고 계심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한국기독교 초기 역사는 비참했습니다.
1866년 8월 27일에 대동강 평양의 한 포구에 제너널 셔먼호를 타고 복음전하러 온 토마스 선교사도 스물일곱 살의 꽃다운 나이에 안타까운 순교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토마스 선교사의 목을 내리친 병사 박춘권은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내가 서양 사람을 죽이는 중에 한 사람을 죽인 것은 내가 지금 생각할수록 이상한 감이 들었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에 그는 두 손을 마주잡고 무슨 말을 한 후 붉은 베를 입힌 책을 가지고 웃으면서 받으라고 권하였다. 내가 죽이기는 하였으나 이 책을 받지 않을 수가 없어서 받아왔노라.”
토마스를 선교사를 죽인 박춘권은 한문으로 된 성경을 영문의 주사였던 박영식에게 건넸습니다.. 박영식은 종이가 귀하던 시절 한문 성경 종이를 떼어서 도배를 했습니다..
나중에 최치량이라는 사람에게 이 집을 팔았습니다.. 최치량은 이 집을 개조하여 여관으로 영업을 했습니다.. 이후 사무엘 마펫, 마포삼열 선교사가 평양에 첫날밤을 보냈는데 공교롭게도 토마스 선교사가 던져준 성경으로 도배한 방에서 숙박을 했습니다..
가만히 보니 예사 벽지가 아니라 성경이었습니다..
사무엘 마펫 선교사는 이 집을 매입하여 널다리골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 교회는 나중에 이름을 바꾸어 장대현교회가 되었습니다..
1907년 길선주 목사님이 대부흥운동을 일으켰던 그 유명한 교회입니다..
또한 토마스 선교사를 죽인 박춘권과 여관집 주인 최치량은 장대현 교회 장로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잘 짜맞춘 드라마라도 이런 역사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드라마이고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의 비전을 따른다는 의미는
첫째로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이고
둘째로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다르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모든 것을 사도바울처럼 다르게 해석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지금의 모든 고난과 어려움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때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예수님께서 핏값을 치르고 사신 존귀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에 사랑을 사모하는자 찬양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