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따르기 2. 권하며 살기_행2:40-42_1월16일
비전따르기 2. 권하며 살기
사도행전 2: 40 – 42절
지난 한 주간동안 우리는 신년 특별새벽기도를 하며 우리의 신앙을 견고하고자 간절히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잃어도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고 신앙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신앙생활을 하며 사는 삶은 복받은 삶이며 인생을 구원하는 삶이기에 우리는 이 소중한 인생 구원줄을 꼭 붙잡고 한 해를 힘차게 걸어나가시길 축원드립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예수님의 비전따르기 첫 번째로 확증하라라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은 편향된 그 어떤 이단도, 사설도, 교주를 위한 종교도 아닌 생명과 관련된 진리이고 인생전체를 구원하는 길이 되며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참 빛이 되는 확신이라고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이 확신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 2가지 삶을 증거로 남기게 되는데
1)하나님의 용서를 확인하고 또한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증거의 삶을 증거로 남기고
2) 모든 고난속에서 죽음을 넘어서는 부활의 소망으로 일어서는 증거의 삶을 체험하게 된다고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초대교회 사도들과 성도들은 이러한 확증이 분명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살기에 날마다 세상을 향해 권하는 삶을 실천하였던 것입니다
권하는 삶이란 예수님의 비전을 따르는 삶이기도 합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무엇을 권하는 것입니까? 40절에 나옵니다
행2: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전도란 바로 권하는 삶입니다
우리 사회는 지금 많은 사람들이 환경과 여건에 눌려있고 막혀 있고 갇혀 있습니다
비단 코비드 19의 전염병때문만이 아니라 사회 구조 방식과 권위자의 가치기준에 따라 다양한 모습의 통제와 고통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다 당연히 각 개인을 볼 때 처음당하는 일들이라 스스로 대처하는 방법이 다 다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슬픔과 눈물을 자아내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새 중독에 빠지는 분들이 많이 있는 것을 봅니다
술 한잔이 아닌 알코올 중독에 이르고 시간 여유가 아닌 게임중독에 빠져들고 TV중독 쇼핑중독, 핸드폰 중독등 다양한 늪에 빠져 사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중독이란 정신 병리학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특정 물질을 사용하거나, 혹은 특정 행위에 몰두함으로 인해 생기는 다양한 사회적, 개인적, 심리적 부적응적 증상을 말하는데 장애라는 것입니다
즉 너무 많이 해서만이 문제가 아니라 다른 일들에 장애가 오는 상태을 말합니다
즉 희망이 사라지고 의지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선한 의지가 사라지는 상태입니다
모든 것의 원인을 남에게 돌리고 나는 중독의 늪에 빠져 머물르고 주저 앉고 싶은 것입니다
술 권하는 사회 라는 단편작이 있습니다 현진건의 작품(1921년 11월에 <개벽>에 발표)으로 일제치하 지식인의 무기력을 다룬 작품입니다
내용을 보면 아내는 결혼한 지 7,8년째 홀로 동경에 간 남편을 기다립니다.
공부라는 것을 돈 나오는 도깨비 방망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공부하고 돌아온 남편은 생각했던 만큼 똑똑하고 능력있는 사람과 다르게 행동합니다
매일 술에 만취해 들어오는 것이입니다
어느 날 새벽 2시에 만취해 귀가하는 남편에게 아내는 술 좀 그만 마시라고 투정합니다 남편은 무엇이 자신에게 술을 먹이는지 아느냐고 아내에게 되물어봅니다
아내는 하이칼라와 홧병이라고 답하지만, 남편은 둘 다 답이 아니라고 합니다
남편은 조선 사회가 자신에게 술을 권한다고 말합니다 아내는 사회라는 단어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요릿집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남편은 "아아! 답답해!" 하면서 집을 나서고 아내는 "그 몹쓸 사회가, 왜 술을 권하는고!"라고 하며 절망하는 모습을 그리는 작품입니다
그는 실망에 실망을 더합니다
일제 강점기인데 서로 다투는 조선사람들을 보고 이렇게 푸념합니다
모이는 사람놈 치고 처음은 민족을 위하느니, 사회를 위하느니 그러는데, 제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느니 아니하는 놈이 하나도 없어. 하다가 단 이틀이 못되어, 단 이틀이 못되어… 되지 못한 명예 싸움, 쓸데없는 지위 다툼질, 내가 옳으니 네가 그르니, 내 권리가 많으니 네 권리 적으니… 밤낮으로 서로 찢고 뜯고 하지, 그러니 무슨 일이 되겠소. 회(會)뿐이 아니라, 회사이고 조합이고… 우리 조선놈들이 조직한 사회는 다 그 조각이지. 이런 사회에서 무슨 일을 한단 말이요. 하려는 놈이 어리석은 놈이야
그래서 술을 안 마실수 없다는 것이고 사회가 자기에게 술을 권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시대와도 그렇게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회현상은 다 똑같고 과거 로마치하에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도 다 똑같았습니다 부정과 부패와 다툼과 싸움, 바리새인 사두개인 싸움...
그래서 베드로는 이렇게 권하는 것입니다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
이 패역한 세대란 구부러진, 비뚤어진 시대, 악한 세대를 뜻합니다
그래서 40절을 현대어 성경으로 읽으면 이렇습니다
행2:40 그러고 나서 베드로는 긴 설교를 통해 예수에 대해서 알려 주고 악한 세대에서 구원받을 것을 모든 청중에게 강력히 호소하였다
왜 당시 시대를 비뚤어지고 악한 세대라고 표현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왜 우리는 이 세대에서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를 간단히 한 가지만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조금 서론이 길어짐을 용서하십시오)
수치를 절대화하는 세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수치를 너무 과신하고 맹신하고 더 나아가 우상화하는 풍조가 우리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1) 과시하고 있는 정형화된 수치가 우리를 묶어놓고 있습니다
현재 상황에서 보면 뉴스에서 계속 코로나로 죽는 사람이야기만 한다면 죽음의 공포는 방구석구석까지 찾아들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회복된 사람, 무증상으로 지나간 사람이야기만 한다면 우리는 이렇게까지 두려워하고 무거운 사회분위기는 아닐 것입니다
통계 자료를 단순 프레임으로만 볼 때 사회는 경직되고 고통스러워지는 것입니다
통계는 결합과 교차 프레임으로 볼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 사회는 다양한 각도를 제시하지 않기에 오류와 함정속에서 비난과 증오를 키워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각각의 통계를 만드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가 거기서 노리는 목표가 무엇인지 항상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예를 들면 작년에 경동시장에서 불이 났다고 방송에 나오면 사람들은 경동시장 전체가 불난 것으로 생각해서 시장에 발도 안들여 놓치만 사실은 가보면 한 구역만 불이난 것이지요 .... 그럼 다른 구역의 분들까지도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방송은 자기의 뉴스를 드러나고 절박하게 강조하려고 확대포장하는 것이지요 .
이렇게 단순프레임으로 사람들에게 선명하게 보일 때 사용하는 방식이 수치이고 통계입니다
2) 맹신하고 있는 정형화된 수치가 우리를 교만하게 하기도 하고 비굴하게 만들어갑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배웠던 고정 관념인 수, 우, 미, 양, 가 식의 평가와 백분율 몇 %의 수치에 익숙해져 있어 적어도 미 정도는 넘어야 보통이고 70% 정도는 되어야 기본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 양과 가는 다 죽여야 하는 것입니까? 인생이 끝인 것입니까?
통장의 플러스 숫자가 높을수록 그 사람의 인격이 훌륭하고 살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묻습니다 자신의 통장이 마이너스라고 무가치하고 비천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까?
어느날 갑자기 폼페이도시처럼 플러스가 제로가 될수 있고 어느 시점이 지나면 엄청난 마이너스였는데 한강의 기적처럼 플러스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수치도 어느 통계도 미래의 내 인생을 건드릴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동시에 지금의 내 인생의 가치와 내 인생의 소중한 시간들을 평가 절하 할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더 이상 구불어지고 비뚤어진 세대에서 나를 놓치거나 내 자신을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신앙이 왜 중요하냐하면 우리의 존재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2.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하늘의 도우심을 받을수 있는 존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3. 우리는 예수님께서 핏값을 주고 구하였고 우리의 인생은 전체가 구원받았고 미래는 소망으로 전진해나가게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이 왜곡되고 비뚤어진 시대의 풍속에서 우리 자신을 똑바로 세우고 견고하게 살기 위해서는 신앙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증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세대를 향해 구원을 말하고 구원을 권하고 구원을 강력하게 호소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가 말한 구원을 받으라라고 권하는 말씀을 현재의 관점에서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요?
첫째로 어두움에서 예수님의 빛을 보라고 권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대는 우리에게 항상 어두운 지표를 강조합니다
정확히 하자는 것입니다 준비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우리는 그 어두움속에서 머물러 있고 숨어지내기를 좋아합니다
빛을 보지 못하고 어두움을 쳐다 봅니다
현재 있는 면을 보지 않고 없는 면만 보게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 자신을 소중하게 보거나 존귀하게 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처음태어났을 때를 기억하시는 분은 없으실 것입니다
모든 이들이 아기를 바라보고 환하게 쳐다보고 예뻐해주고 축복해줍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비교와 경쟁으로 숫자가 붙어집니다 1등 2등 3등 ....꼴등...
정말 숫자가 밀리면 어두움으로 끝이 나는 것입니까?
수치와 계산이 인간을 어두움 아래로 몰아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원래는 인간이 평등하고 공평하게 쓰려고 계발한 숫자인데 인간을 차별하고 인간의 평가절하하는데 사용하곤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요셉은 처음에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받고 곱게 자랐습니다
그러나 이복 형들의 질투와 시기로 노예로 전락해버리고 맙니다 이제 그는 어두움으로 끝이 나는 것입니까? 그의 미래의 마지막 길은 비참한 암흑입니까?
세상의 가치는 그것을 강조할 것입니다 운명주의자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를 빛으로 나오게 하였습니다
요셉은 평생 감옥에 들어가는 막장의 삶속에서도 꿈을 꾸며 하늘의 빛을 사모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의지하였습니다 그는 끝까지 빛을 바라보는 자세를 잃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집트의 총리에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점점 더 강한 자 약한 자의 간극이 벌어지고 있고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사이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빛은 없는 것입니까? 구름 위에 해는 사라진 것입니까? 하나님은 간섭을 못하시는 분이십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에 강하게 권하고 호소해야 합니다
어두움에 머물러 있지 말라고 ... 어두움에서 빛으로 나오라고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에게 말씀하시대로 무덤에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신 것처럼 진리로 나오라고, 생명으로 나오라고 권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권하는 대로 살면 안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권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수치와 계산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섭리의 세상이 있다는 것을 권해야 합니다
열명의 정탐꾼과 두명 즉 여호수아와 갈렙은 10: 2라는 수치였습니다
기도온의 용사와 미디안 군사들은 10만 대군 : 300명이었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은 꼬마 : 거대한 거인 장군이었습니다
오병이어 즉 생선 2마리와 떡 5개로 5000명을 먹이셨습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수치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손길과 기적은 지금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수치의 절망의 끝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와 기적을 호소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수치를 들고 무모하다고 하지만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에 하나님 나라를 알려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일어서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바꾸어 주신다고 원해야 합니다
신앙을 가지고 걸어가면 하나님께서 가정을 벼놔시켜 주신다고 믿어야 합니다
은혜를 붙잡고 감사를 표현하면서 산다면 적어도 내 주변은 천국이 될 것이라고 호소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회 분위기와 세태에 매몰되지 마시고 믿음의 눈을 드십시오 사랑하는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주변에 죽어가는 영혼, 무너지는 영혼을 위해 권하십시오
이 구부러진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 같이 찬양을 하시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자 하나님의 평안을 바라보는자
너의 모든것 창조하신 우리주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하는자 하나님의 선하심을 닮아가는자
너의 모든것 창조하신 우리주님이 너를 자녀 삼으셨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