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을 위한 애절한 기도_롬9:1-5_2월27일
민족을 위한 애절한 기도
로마서 9장 1절 - 5절
오늘은 103주년 삼일절 기념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국의 봄은 삼일절과 함께 온다.” 특히 올해는 3월 9일 대통령 선거와 맞물려 있어서 우리가 기독교인으로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면서 기념예배를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누구를 대통령으로 뽑느냐가 나라 사랑하는 일도 될 수 있지만 본질은 사람보다 우리의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형성되는 선거기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간절한 나라사랑 기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참 가난하였고 일제 강점기로 36년간 보냈으며 6.25전쟁으로 동족끼리 서로 죽이는 고통의 나라였고 폐허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현재 명실상부 선진국의 위상을 갖추어나가고 있는 나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21세기 국가의 경쟁력을 나타내는 지표로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력'으로 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지표로는 'GNP'와 'GDP'가 있습니다.
GNP는 국민총생산을 의미하고 GDP란 '대한민국에서 생산된 모든 물질적 부'를 의미하는데 요새는 GDP로 국가의 경제력을 평가합니다.
- 2021년 세계경제 순위 GDP기준 1.미국 2.중국 3.일본 4.독일 5.영국 6.프랑스 7.인도 8. 이탈리아 9.캐나다 10.한국 순입니다
- 국가별 수출액에 있어서도 1.중국 2.미국 3.독일 4.일본 5.네덜란드 6.홍콩 7.한국 8. 이탈리아 9.프랑스 10.벨기에 등 7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성장과 발전을 이룬 나라가 된 것입니다.
이해하기 쉽게 평가하자면 5000년 역사상 GNP 100달러를 넘어 본 적이 없는 나라였고 1953년 1인당 국민소득은 66달러로 세계 최빈국이었던 한국은 2017년(3만 1734달러) 처음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를 열었고 2020년 현재 3만 644달러 정도로 세계 26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되기에는 근세사를 통해 독립운동, 새마을운동, 민주화 운동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1919년 3월에 일어난 3·1운동의 영향이 우리나라의 민족적인 발흥을 가져 왔다는 데에 모두가 의견이 일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한국의 봄은 3·1절과 함께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3·1독립운동은 세계사적으로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무저항운동, 이집트의 반영 자주운동, 터키의 민족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입니다. 특히 삼일운동은 기독교적인 가치관이 잘 스며든 민족적인 운동이었고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나라를 사랑했는지를 명백하게 확인할 수 있는 독립운동이었습니다.
- 독립선언문 앞부분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이는 하늘의 분명한 명령이며 시대의 큰 추세이며, 온 인류가 더불어 같이 살아갈 권리의 정당한 발동이기에, 하늘 아래 그 무엇도 이를 막고 억누르지 못할 것이니라. … 우리는 본디 타고난 자유권을 지키며 풍성한 삶을 누릴 것이며 진리가 우리와 함께 전진하나니”
-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보면
양심이 우리와 함께 있으며, 진리가 우리와 더불어 나아가는도다. 남녀노소 없이 음침한 옛집에서 힘차게 뛰쳐나와 삼라만상과 더불어 즐거운 부활을 이루어내게 되도다.
기독교적인 용어가 많이 들어 있습니다.
- 또한 3.1만세 시위가 고조될 즈음에 서울에 뿌려진 [독립단 통고문]은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들의 투쟁 방법론을 이렇게 가르칩니다.
①일본인을 모욕하지 말 것. ②돌을 던지거나 주먹을 치는 등의 폭력을 사용하지 말 것.
③매일 기도와 성경묵상을 할 것 매일 3시에 기도하고 주일은 금식하며
월요일 이사야 10장, 화요일 예레미야 12장, 수요일 신명기 28장, 목요일 야고보서 5장, 금요일 이사야 59장, 토요일 로마서 8장을 읽으라고 권면했다고 합니다.
최남선은 선언서를 기초하며 기독교 이념을 수용, 민족의 독립을 주장하면서도 보편적 가치관과 인류 공존을 지향하며 비폭력 평화를 중심으로 작성했다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진정한 민족과 나라사랑은 이데올로기에 기초하지 않고 민족주의, 제국주의, 국수주의를 경계해야하며 국가를 공동의 이익집단으로 보는 시각을 뛰어 넘어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을 섬기는 구원의 백성에 기초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이렇게 민족을 위해 애절한 기도와 간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 롬9:1 나의 겨레 이스라엘 사람들이여! 나의 동족유대인들이여!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나아가기를 내가 얼마나 원하고 있는지 여러분은 모를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 때문에 밤낮 마음이 무겁고 슬픔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만일 나의 영원한 파멸이 여러분에게 구원을 가져올 수 있다면 나는 차라리 그 편을 택할 것입니다. 이것이 단순히 겉치레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도 아시고 성령께서도 아십니다.
즉 민족이 예수님 믿고 구원을 얻는 데에는 나의 목숨도 아깝지 않다는 호소이고 기도인 것입니다 이 사도 바울의 애타는 마음, 간절한 마음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중요한 줄로 믿습니다. 성경을 보면, 나라 사랑한 사람들은 모두가 참으로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 구약 출애굽기에 보면 모세도 민족을 향한 간절한 그의 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출32:32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 기도온도 그랬고 삼손도 그랬고 다윗도 그렇게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며 민족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 느헤미야는 자기 조국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수일을 앉아서 울며 금식하며 기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고,
- 예레미야도 조국을 위하여 "내 눈에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 예수님도 역시 이스라엘을 위하여 우셨습니다. 감람산 위에서 자기조국의 멸망을 눈앞에 내다보시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시며 피맺힌 민족애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오늘 사도바울도 다른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다보니 자기 백성들 유대인을 향한 민족 구원의 간절한 눈물이 나왔던 것입니다. 민족을 구원하는 일에 자기 목숨도 아깝지 않다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그저 자기의 안일과 지산의 가정만 챙기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음의 선진들처럼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나라와 민족을 향해 이렇게 기도해야하겠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3·1운동의 연합 정신을 배워 나라의 일치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어느새 타인을 용납하며 수용하는 자세를 놓치고 살아가고들 있습니다. 이질적인 문화, 다른 생각을 수용하는 마음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물론 정치권이 부추기기도 하고 사회 환경이 경쟁의 시대를 지나왔고 독재시대를 뚫고 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를 찾자면 반도 국가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단일민족에 대한 긍지로 수용, 배려보다는 배타와 거부를 선택하는데 익숙하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1919년 3·1운동은 이 모든 것을 뛰어넘는 돌파의 시간이 되었던 것입니다. 3·1독립운동은 종교, 지역, 계층, 세대를 초월해서 연합하였고 전국 각지에서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한 마음이 되었던 시간이었습니다. 가장 연합에 열심이었던 것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3·1독립운동의 조직적인 전개 및 인원 동원, 국내외에 독립선언서 및 각종 문서의 전달에 교회가 중심 역할을 했습니다. 전체 인구에서 불과 1% 정도였던 기독교인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제에 의해 기소된 사람의 25%, 전체 투옥된 사람의 40% 정도를 차지할 정도였습니다.
리더들의 연합 정신을 보면 불교에서 한용운 스님 등 2명, 천도교의 손병희 선생 포함 15명, 기독교에서는 이승훈 선생 포함 16명이 기독교의 대표로 나왔습니다. 기독교에서는 목사는 11명, 전도사가 3명, 장로가 1명, 평교인 1명이었는데 이 기독교 지도자들이 다른 종교인들과 태화관에 모여서 밤새도록 머리를 맞대고 같이 힘을 합쳤다는 것이 역사적 교훈이고 우리 민족의 희망의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질타 중의 하나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이라는 지적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의 배타적 정신이라는 것은 진리를 타협할 수 없다는 정신이고, 예수 이외에는 구원의 길을 주신 적이 없다는 구원관에 있어서 구별되었다는 말이지, 생활에 있어서 불교인들과는 밥도 먹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생각이 경직되어 있는지 목사와 스님이 밥만 같이 먹어도 이단으로 본다든지, 교회 행사에서 산행을 가서 절에 발길만 들여도 불안하게 생각하고 그리고 스님과 인사만 해도 비난을 하는 것은 독선적인 생각입니다. 그런 태도는 예수님의 말씀을 붙잡고 한번 더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과 인간, 이방인과 유대인, 신자와 불신자의 막힌 담을 헐고 평화를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교회의 담과 울타리를 넘어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만 있으면 누가 세상을 구원하겠습니까? 어떻게 세상과 진리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엡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 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 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 심이라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일치를 꿈꾸고 희생을 감당하면서라도 하나됨을 이루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5: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 도 돌려 대며
라는 말씀은 일치와 사랑을 희생을 감당하면서도 이루라는 강조의 말씀인 것입니다
마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어떤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 부류의 이익을 위해 나라를 반으로 가르고 인간의 이념을 가지고 보수와 진보로 판단하게 만들며 혹여 참여하지 않는 우리를 회색분자라 비난할지라도 우리는 연합과 일치를 꿈꾸며 기도하는 선도적이 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대통령이 나오고 이번이 아니면 다음에라도 이런 지도자들이 계속 나오기를 간절히 정말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는 3·1운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이 가졌던 하나님 의지함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당시의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힘을 이용하여 군중으로 폭력을 행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먼저 기도하였습니다. 유관순 열사가 의연하게 죽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한 애국의 정열 때문만이 아닙니다. 신앙 때문이고 기도 때문인 것입니다.
3·1운동 일어나고, 얼마 후인 3월 13일 유관순이 고향에서의 독립운동을 위해 독립 선언서를 숨겨 가지고 아우네로 내려 왔을 때 고향은 너무나 조용했습니다. 고향 사람을 설득하기 시작했지만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때 그는 어린 조카 유제하를 데리고 천안의 매봉산에 올라 추운 날씨였지만 3일간 나라를 위한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이 3일 동안의 기도를 그녀의 조카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사흘 동안 기도만 했습니다. 사흘째 되던 날 뭔가 계시를 받은 듯 기도를 마친 그의 얼굴은 온통 환하게 빛이 났고 말에 힘이 있었고 담대한 모습이었습니다.” 산에서 내려온 유관순의 말에 고향 사람 모두는 이상하리만치 귀를 기울이고 경청을 시작합니다. 이렇게 해서 3월 1일 파고다 공원에서 시작되었던 운동이 바로 아우네 장터의 독립만세 운동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인 단순히 사람이 한 일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기도의 힘, 성령의 힘으로 된 일이었습니다. 체포된 유관순은 감옥 생활 중에도 하루도 기도를 거르지 않고 조국을 위해 자신의 믿음을 위해 그리고 함께 감옥에 갇힌 사람들이 변절하지 않도록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진리를 붙잡는 배타적인 모습이 있는 기독교 신앙인 것입니다. 1920년 10월 12일 18살의 나이로 생을 마친 그녀는 단순한 애국 열사가 아니라 순교자로서 생을 마감합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바울의 나라 사랑 고백을 유관순 열사가 이루고 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