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그리스도인 (에스더 4: 13- 17절) 2019년 2월 24일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그리스도인
2019년 2월 24일
본문 : 에스더 4: 13- 17절
올해 삼일운동은 100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이번 주 금요일의 꼭 100년전 1919년 3월 1일은 한국교회의 하나의 전환점이었습니다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은 종교별로 대표를 정했다고 합니다
천도교, 기독교, 불교, 각 15명, 16명, 2명씩 참가하였습니다
당시 한국교회 교인은 29만명으로 1,678만의 인구중 약 1.8%였습니다
반면에 천도교는 300만명이었습니다 기독교인수가 가장 적었으나 가장 많이 민족을 위해 참가하였습니다
불교는 교세가 300만이 넘는 대중 종교였지만 민족 대표에는 2명만 참여하여 소극적 모습을 보였습니다. 또한 당시 유교는 조선의 국교이다시피 했지만 한 명도 민족 대표에 나서지를 못했습니다. 다만 만세운동에 후발주자로 참여했습니다. 역시 불교나 유교도 기독교의 주도적 역할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목할 것은 당시 천주교입니다. 당시 교황청은 이태리의 무솔리니 정권과 독일의 히틀러 정권을 지지했습니다. 이태리와 독일과 일본이 군사동맹을 맺고 있기 때문에 교황청은 일본의 신사참배에 참여해도 된다는 전교를 내렸습니다.
그래서 천주교인들은 항일에 나서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기독교와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기독교는 복음화율 1.8%의 미약한 힘으로도 민족운동을 주도하는 빛나는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그래서 3.1 운동 이후 국민들로부터 존경 받는 종교로 발돋움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교세도 급격히 늘기 시작했습니다.
1920년에 32만 3천 명으로, 1922년에는 37만 3천 명으로 늘었습니다.
조선 총독부 집계에 따르면 3월 한달동안에 만세시위가 848건에 달했고 참가자만 60만명이었다고 합니다 만세운동 수감자 9,000명중에 기독교인이 22.4%로 가장 많았다고 합니다
서명할때에 33인중의 한분이신 신석구 목사님은 두가지 고민을 했다는 것입니다 1) 교역자로 만세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가?
2) 천도교와 협력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옳은가? 였습니다
그러다 새벽에 기도하는 중에 2월 27일 새벽에 “4천년 전하여 내려오는 강토를 내 대에 와서 잃어버린 것이 죄인데 찾을 기회 구하려고 애쓰지 아니하면 더욱 죄가 아니냐” 하는 음성이 들렸다는 것입니다
또한 서명을 할 때에 누가 가장 먼저 이름을 올리느냐도 서로 고민이었다고 합니다 그때 기독교인들이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데 앞뒤를 따지겠느냐 연령상으로 가장 먼저가 손병희선생이니 천도교이지만 양보하자고 하여 한 마음으로 서명하였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민족사랑하는 종교로 확고하게 서는 시점이 되기도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3.1절 기념예배를 드리면서 위대한 민족독립운동이었던 3·1만세운동의 정신을 신앙적으로 재해석하고, 오늘 우리가 3·1운동을 어떻게 믿음으로 계승해야 하는지 그 귀한 마음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시는 시간이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 중에 애국자로 본받을 만한 사람들은 모세와 에스더왕비와 사도 바울을 꼽습니다
모세는 금송아지를 섬긴 백성들을 보고 하나님이 분노하실 때, 모세는 슬피 울면서 하나님께 매달려 자기의 목숨을 걸고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출32:32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자기 민족을 위해 간절하고 애절한 마음을 가지고 호소하는 모습속에 민족을 사랑하는 지도자의 모습이 나옵니다
하만의 모함으로 유대 민족이 몰살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 모르드개는 아하수에로 왕의 왕후였던 에스더에게 나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에4:14). 이에 에스더가 대답합니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16절).
당시 왕이 부르기 전에 왕에게 나아가는 자는 누구든지 죽이는 법이 있었지만, 에스더는 목숨을 걸고 왕 앞으로 나아갈 때 왕이 금규를 내밀어 에스더는 자신과 자기 민족을 구원했습니다.
사도 바울 또한 예루살렘과 유다를 벗어나 이방 땅에서 복음을 전하는 이방인의 사도였지만 자기 민족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애국심이 뛰어났습니다.
그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자신의 마음에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말했습니다(롬9:1).
사도 바울을 근심하게 하고 마음에 고통을 준 정체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3절).
비록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더라도 자기의 형제와 친척, 곧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를 믿고 구원에 이르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도 바울의 민족 사랑의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는 고백인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이제 130년된 교회입니다 유럽의 교회들은 그 역사가 깁니다 1000년, 15000년 2000년이 된 교회역사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교회의 역사를 바탕으로 움직인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당시 일제 치하의 상황을 해석하고 출애굽을 꿈꾸었으며 성경에서 에스더를 배웠고 사도바울을 본 받은 것입니다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이 일어난 후 신앙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무장하였고 일본의 총칼 앞에서 그리고 그들의 잔인한 문화말살 정책앞에서도 무릎꿇치 않고 기도하고 민족을 구할 방도를 찾고 후원을 하고 기도하며 교회를 다녔던 것입니다
교회만큼 정기적으로 잘 모이는 단체가 없었기에 일본은 외국 선교사도 내 몰고 항상 순사를 붙이고 설교도 출애굽기 같은 경우는 못하게 했지만 목회자와 성도들은 나라의 해방을 위해 구국의 신앙으로 무장해 나갔던 것입니다
3·1운동 때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붙들려간 기독교인들마다 이러더랍니다
일본 경찰들이 “왜 이 일을 했느냐”라고 문초를 당할 때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랐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3·1운동은 단순히 신념으로 일으킨 운동이 아니라 철저한 신앙운동이었습니다. 그리고 간절히 나라를 위해 기도한 기도운동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오늘 그 시대 믿음의 선배들을 통해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나라를 위한 희생을 믿음으로 짊어져야할 십자가로 해석하였습니다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그 시대의 교인들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바로 희생과 죽음을 각오한 독립운동이었습니다
일본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도 안되는 시기였습니다
국제 사회도 관심이 없었고 나라의 역량도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지금의 북해도와 오키나와 섬같이 조선도 그렇게 합병되어서 지금까지도 일본의 그늘하에서 신음하는 민족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너무 막강한 힘을 가진 제국이었습니다
지금 중국의 신장 위구르족같은 경우 아무리 독립을 외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미 중국 한족의 영향권속에서 벗어날려고 해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큰 제국의 한 부족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기독교인들은 나라를 해방시키는 것이 어렵지만 감당해야할 십자가로 배웠습니다 그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죽을 지도 모릅니다 언제까지 희생을 치르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기로 결심하고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희생을 각오하고 거리로 뛰어나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불렀습니다.
교회는 3·1만세운동의 거점이 되었고, 그로 인해 다른 어떤 종교들보다도 더 많은 핍박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많은 교회가 부서지고 수많은 성도들이 체포되었습니다.
그때 기독교인들은 전 국민의 1.8%밖에 안 되었지만, 3·1운동으로 감옥에 갇힌 9,059명 중에서 기독교인이 2,032명(22.4%)이나 되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때 ‘교회에 가면 손해 본다’고 생각해서 기독교가 점점 힘을 잃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일본 총독부의 계산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3·1운동이 일어난 직후에는 교회가 줄었지만 1921년 이후로는 교회가 늘어나고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 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3·1운동을 겪으면서 백성들이 ‘교회야말로 우리 민족이 믿고 의지할 곳이구나, 예수님이야 말로 우리가 서야 될 반석이구나’ 하고 깨달은 것입니다.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 정신으로 희생을 감당했을 때 교회는 세상의 소망이 되었고 등대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외국에 살다보면 나라가 그립습니다 우리나라가 있어서 든든합니다
국민성이 어떻다고 ... 정권이 문제라고 해외로 해외로 나가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 분들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러나 정권이 바뀔때마다 못살겠다고 나가면 누가 이 나라를 소중하게 생각하겠습니까?
정치지도자들의 무능을 넘어서서 나라의 경제적 상황을 넘어서서 큰 그림을 그리고 우리가 물려주어야 할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마음을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이 비난은 잘합니다 손가락질은 누구든지 합니다
그러나 큰 그림을 그리고 정의가 강같이 흐르고 이웃 사랑이 넘치는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난 해 출산률이 겨우 30만명이라고 합니다
50-60대 세대만 하더라도 100만명이었습니다 모든 교육 시스템과 구조가 그렇게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이제 학교도 줄고 학원도 줄고 그와 관련된 산업도 줄어가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원인을 분석하기도 하고 대안도 말하고들 있습니다
하지만 나라를 위해 30년 뒤 50년뒤 100년뒤의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집단은 많치 않습니다 희생을 각오하고 섬김을 각오하고 누군가는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데 그 사람들이 바로 우리 교인들이고 그리스도인들인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빛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소망입니다 지난 2000년동안 교회가 서있는 마을마다 희망을 가졌고 마래를 꿈꾸기 시작한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바벨론 포로시절 마른뼈들이 살이 붙고 가죽이 덮이고 생기가 들어가서 큰 군대를 이루는 군대환상을 꿈꾸며 유다사람들을 독려했던 것처럼 이 나라 백성들에게 소망을 이야기하고 하나님의 경영을 이야기 할 사람은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 밖에 없는 줄로 믿습니다
이 민족을 위해 이 나라를 위해 기도하기를 쉬지 않는 우리 성문교회가 되길 소망합니다
둘째로는 일치와 화합을 위해 리더쉽을 발휘하였다는 것입니다
남강 이승훈 장로(1869~1933) 은 3·1운동과 연관해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믿음의 선배이십니다
당시 사업가였던 그는 1907년 38살 때 평양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강연을 듣고 즉시 술과 담배를 끊고 민족학교인 오산학교를 설립했으며,
1910년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한석진 목사님의 ‘십자가의 고난’이라는 설교를 듣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십자가의 정신으로 우리 민족을 구원할 것을 결단하면서 본격적으로 애국독립운동과 신앙운동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이승훈장로님은 중요한 순간에 또한 일치와 화합을 위해 리더쉽을 발휘하셨습니다 독립선언서에 33인이 서명을 할 때 누가 이름을 먼저 적느냐 하는 순서를 두고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천도교인와 기독교인 사이에 마찰을 겪었다고 합니다. 그때 남강 이승훈 장로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이 어느 때라고 이러시오. 이것은 죽는 순서요! 죽는 순서로 연세가 많으신 손병희선생을 먼저 쓰시오.” 이렇게 양보해서 33명 중에서 가장 고령이었던 천도교인 손병희 선생이 3·1독립선언서에 가장 먼저 서명하여 33인의 대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중요한 순간에 우리의 이기심이 발휘됩니다 앞서고 싶은 욕망, 드러내고 싶은 욕심, 그래서 갈등이 되고 싸움이 되고 원수가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저는 자주 예민한 순간에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이야기를 떠올리려고 노력을 합니다
창13:6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창13:7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창13:8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그러면서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합니다 참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창13: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아브라함은 무엇이 화합인가를 생각한 것입니다
비록 아랫사람이지만 갈라서는 마당에도 화합과 일치를 염두에 두었습니다 네가 죄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리라 ..
이것은 마음의 화합과 일치를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아는 어른의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신앙인의 모습이었습니다
서로 갈라질 수밖에 없으나 마음은 하나와 일치를 추구하기 위하여 자신을 조카와의 화합의 제물로 드린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사회에 모두 이렇게 살수는 없지만 이러한 일치를 추구하는 말과 표현과 행동이 우리 교회안에서 일어나기를 소망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일치와 화합을 위한 생활속에서의 양보와 희생은 반드시 선한 열매를 가져올 것입니다
셋째는 류관순 열사뿐만 아니라 많은 여성들의 결연한 참여가 드러났다는 점입니다
3.1운동 중심에 김마리아(1892~1944) 선생이 여성으로 먼저 영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황해도 장연에 우리나라 최초로 소래교회와 학교를 세운 가문에서 태어났고, 가문 전체(김필순, 서병호, 김규식, 김순애, 김필례, 남궁혁, 김마리아, 김 염, 서재현 등)가 국내외에서 대한독립운동에 참여한 한국 근대사에서 기독교신앙이나 애국애족, 사회교육에 모본이 되는 환경에서 성장하였습니다.
1919년 2월 8일 일본 동경에 있는 YMCA 회관에서는 재일한국유학생 400여명이 모여 2.8독립선언서를 낭독했습니다.
연동여학교(지금의 정신여학교) 출신이었던 김마리아 선생은 동경여학교 고등과 졸업을 한 달 앞두고 있었는데, ‘졸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조국의 독립이다’라고 결단하고 졸업을 포기한 채, 한복만을 입던 선생은 단 한번 기모노를 입고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귀국하여 부산, 대구, 대전, 서울, 황해도까지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여 3·1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습니다.
서울에서 체포되어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문을 당했습니다.
김마리아 선생을 취조하던 판사가 “너는 현모양처나 되라”고 호통을 칠 때, 김마리아선생은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천안에 있는 독립기념관 어록비에는 “독립이 성취될 때까지 우리 자신의 다리로 서야하고 우리 자신의 투지로 싸워야한다”라고 씌여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나라를 생각해보는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배를 드릴수 있는 것도 나라가 있기 때문이고 이렇게 평화스러운 것도 누군가 서로 희생하며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할수 있는 첫 번째는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조국의 통일과 국민들의 일치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국을 세우고 강대국을 만드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정의와 사랑이 공존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을 목표가 되어야 함을 잊지 말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꿈을 꾸며 환상을 보고 민족을 위해 에스겔처럼 기도하는 저희교회가 되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마지막 날에 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내가 나의 영으로 모든 백성에게 부어 주리라
자녀들은 예언 할 것이요 청년들은 환상을 보고
아비들은 꿈을 꾸리라 주의 영 임하면
성령이여 임하소서 성령이여 우리에게 임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