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어떻게 걸어가면 좋을까?_벧전2:19-25_2월21일
도대체 어떻게 걸어가면 좋을까?
2021년 2월 21일
본문 : 베드로전서 2: 19- 25절
어느 집사님 가정에서 손님들을 초청하여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집주인인 엄마다 6살 된 딸에게 말했습니다. 오늘 식사 기도를 네가 한번 해볼래?
그러자 딸이 “엄마 난 기도할 줄 모르잖아” 말합니다. 그러자 엄마가 말합니다.
“그냥 엄마가 평소에 하던 대로 하면 된단다”
그러자 딸이 머리를 끄덕이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 하나님 왜 자꾸 우리 집에 귀찮은 손님들이 많이 올까요?
그날 저녁 식사는 영하 20도 식사가 되고 말았답니다.
우리의 삶은 흔적이 남습니다.
우리의 말, 우리의 행동, 그리고 우리의 결정은 주변에 영향을 미칩니다.
부부의 싸움은 자녀들에게 치명상을 입히고 힘 있는 사람들의 다툼은 약한 자, 가난한 사람들에게 중대한 고통의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특히 어려운 시기에는 사람들의 본능이 드러나서 그 사람의 인격의 정도가 다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험한 말, 악한 말 그리고 공격하는 말들이 나오면서 아름답게 가꾼 정원을 망가뜨리고 고생해서 쌓은 성을 한번에 무너뜨리는 재난이 닥치는 것입니다.
가능하면 어려울 때는 섭섭한 말, 까놓고 하는 말, 솔직하게 말할께 등의 말들은 안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에리히 프롬이라는 사회심리학자는 건강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주변을 아름답게 꾸민다고 말합니다. 건강한 성격의 특징을 보면 4가지로 말합니다.
1)생산적 사랑을 한답니다. 책임지는 사랑 존중하는 사랑입니다.
2)생산적인 사고를 한답니다. 부분을 보지 않고 전체를 보고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미래를 제시하는 생각입니다.
3)생산적인 행복을 추구한답니다. 감정적인 단순한 행복이 아니라 창조적으로 창의적으로 발전하는 행복을 말합니다.
4)생산적인 양심을 가지고 주변을 대한다는 것입니다.
자유롭고 거리낌없이 사람을 대할수 있는 인격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어려울 때 어떻게 생각을 하고 힘들 때 어떻게 말을 하느냐가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 19가 일년을 넘게 지속되는 가운데 많은 재난을 경험합니다.
자연적으로는 추위도 자주 찾아오고 미국은 국토의 3분의 2가 폭설로 덮이고
사회적으로는 다툼과 공격과 적대감정이 증가하고 있어서 늘 긴장상태이고
개인적으로는 우울함과 경제적인 위기감이 그리고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의 마음을 흔들고 바닥을 치게 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길을 잃고 답답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마치 목자잃은 양같이 다양한 길을 찾아 헤매고들 있습니다.
주식을 하면 나을까? 로또를 하면 대박이 날까? 아니면 비트코인을 사두면 인생전환이 찾아올까? 모두들 흔들리고 갈 바를 알지 못해 답답해들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우리는 어떻게 마음을 잡아야 할까요?
도대체 어떻게 걸어가면 좋을까요?
특히 신앙인으로 이 어려운 시기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이 어두운 터널을 벗어났을 때 넉넉하고 감격스러운 가나안땅에 이르를수 있을까요?
오늘 베드로전서 2장말씀은 우리 성도들에게 분명한 답을 주고 있다고 믿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어려운 시기를 그리고 개인의 고난을 3가지 방식으로 해석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첫째는 고난에는 죄가 있어 매를 맞는 고난이 있다고 하십니다.
둘째는 고난에는 부당하게 당하는 고난이 있다고 하십니다.
셋째는 고난에는 선을 행함으로 자원하여 당하는 고난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첫째로 고난에는 죄가 있어 매를 맞는 고난이 있습니다.
벧전2: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스스로의 잘못과 죄로 인하여 당하는 고난을 말합니다.
말로 인한 싸움, 부덕한 행동으로 인해 오는 제약들 이 모든 것은 징계처럼 다가오는 고난입니다.
지난 목요일에 점심을 순두부찌게 먹으러 삼육병원 앞으로 갔는데 경찰차 소방서 차가 벤츠한대를 둘러싸고 아우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벤츠 운전사가 포위망을 뚫고 치고 나가는 겁니다. 그러자 경찰차가 쫓아가고 가로막고 ... 장로님들과 식사를 하고 나오면서 보니까 벤츠 앞 유리창이 깨져 경찰차 옆에 덩그러이 있었습니다. 술을 먹은 운전자인지 마약을 한 운전자인지 하여튼 그 한 사람의 잘못으로 차도 망가지고 온통 주변이 소란스러워졌었습니다.
요새 주식투자 실패, 도박, 폭음, 마약흡입들으로 주변을 망가드리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핑계는 있습니다. 힘들어서 그렇다 마음이 허해서 그렇다 ...
그러나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은 온통 상처 받고 마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죄로 인하여 당하는 고난은 상급도 없고 열매도 없습니다. 오직 상처와 괴로움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홀로 왜 내 인생은 이렇지 자조만 한다면 미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3년동안 예수님과 동거 동락하며 배웠지만 인간인지라 잘못을 하게 됩니다.
가롯유다는 예수님을 은 30냥을 받고 대 제사장 무리들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베드로도 잡히시던 날 밤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어린 소녀앞에서 3번이나 부인하였습니다.
얼마나 치졸한 남자입니까?
그런데 그 잘못으로 인해 고난을 당하는 대처 방식은 달랐습니다.
가롯유다는 그 날밤 자살하고 맙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통곡하고 웁니다.
가룟유다는 거기서 인생의 끝을 맺었고 베드로는 뉘우쳐 돌이켜 이후에 대 사도로 로마까지 가는 전도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스스로의 잘못으로 안한 고난은 징계입니다. 사람들의 징계일수도 있고 하나님의 징계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돌이킴입니다. 빨리 돌이켜 나오는 것입니다. 그 고난은 언제 끝이 나는 것입니까? 뉘우치고 돌이켜서 나올 때 그 고난은 끝이 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고난이 올 때 잘 살펴보시고 나의 잘못으로 나의 죄로 인해 왔다면 돌이켜 회개하시고 빨리 벗어나시길 기도드립니다.
둘째로 고난에는 부당하게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벧전2: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사회적이고 환경적인 고난이 있습니다. 뜻하지도 않았는데 고난이 찾아올 때가 있는 것입니다. 옆집이 불났는데 우리집도 같이 불탔다면 얼마나 억울한 것입니까?
누가 공을 발로 찼는데 우리집 유리창이 깨졌다면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그런 일들이 있습니다. 부당한 판결, 잘못된 증언, 말도 안되는 비난 때문에 당하는 아픔이 있습니다.
내 스스로를 생각해볼 때 잘못이 없는데 당하는 고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구약 창세기에 보면 요셉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복 형제들의 의해 느닷없이 노예로 팔려 나갔습니다. 아버지에게 인사한번 못하고 끌려 나갑니다. 보디발 장군의 아내의 모함으로 평생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세상에 이것보다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험악한 세상을 살다보면 소송을 하고 혈기를 부리고 주먹을 휘둘러도 안되는 억울한 일들이 있는 것입니다.
왜 당하는지, 어째서 당하는지, 결과가 어디에 있는지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저 당할 따름일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러한 상황을 그리스도인들은 연단으로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젊었을때는 이러한 말이 무눙하고 허약한 생각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해도 해도 안되는 고난이 정말 있는 것을 봅니다.
속을 끓이고 분노를 토하고 한탄하며 보내야 할까요?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이러한 고난은 바로 연단이 되는 것입니다.
연단은 결과가 있습니다. 연단은 반드시 선한 축복이 동반되는 것입니다.
말도 안되고 상상도 안되는 큰 고난을 당하였을 때 욥은 이렇게 믿음의 생각을 하였습니다.
욥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정금은 불순물을 빼내기 위해 높은 온도로 끓입니다. 그리고 순금이 되고 가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평생 감옥을 지나자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다윗은 사울왕의 핍박을 피해 다니고 나서야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유대인들의 공격과 살해 협박을 피해다니며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없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심으로 죄사함의 역사를 이루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입니다.
그럼으로 부당한 고난은 연단이라고 믿음의 생각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연단의 시기에는 빨리 빠져 나오려고 생각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셔야 합니다.
스스로의 죄로 인한 고난은 빨리 회개하고 벗어나야 하지만 연단으로 인도하는 고난은 때를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참고 인내하고 견디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시간에 우리를 독수리 날개처럼 차고 오르게 하실 것입니다.
셋째로는 고난에는 선을 행함으로 자원하여 당하는 고난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벧전2:20 ...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것을 명품연단이라고 합니다. 선을 행하다가 주의 사명을 감당하다가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쿼바디스"라고 하는 영화를 보셨을 것입니다. 당시 로마라고 하는 도시가 맘에 안 들어서, 소위 예술가를 자처하는 네로 황제가 사람을 시켜서 불을 지릅니다.. 다 태워버리고 다시 만들려고. 그리고 그 원망을 기독교인에게 씌워버립니다.. 불은 네로 황제가 지르고 죽기는 기독교인이 죽습니다.. 수만 명을 잡아다가 원형극장에서 죽입니다.. 이렇게 억울하고 무모한 죽음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있던 대 사도 베드로가 사환과 함께 로마를 벗어나려고 도망을 합니다.. 로마성 밖으로 나갈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거꾸로 로마로 들어가십니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그때에 예수님 말씀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버리고 나온 로마를 향해서 내가 가서,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려 한다" 베드로가 "오 주님 아닙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다시 발걸음을 돌이켜서 로마로 갑니다..
거기서 베드로는 결국 잡히고 십자가 형을 당하게 되는데 "내가 감히 어떻게 예수님과 같은 모양으로 죽겠느냐? 거꾸로 매달아 달라."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서 베드로가 순교를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났던 곳, 거기에 발자국 형상이 있습니다..
여러분, 피해가다가 잡히는 것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한탄하며, 저주하며, 죽는 것도 순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선택하셨습니다. 죄가 있어서 당한 것이 아닙니다. 부당하게 당하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기꺼이 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아버지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기도하시고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입니다.
주님 사랑하기 때문에 주의 일을 하다가, 주님의 말씀 때문에 스스로 고난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 1884년 대에 들어온 많은 젊은 선교사들은 서양 코쟁이 , 서양귀신이라고 박대하고 물을 뿌리고 이 척박한 당에서 아이들을 키우다가 자녀들이 풍토병으로 죽어나가도 스스로 고난을 자처하며 머물러 교회를 일으키고 병원을 세우고 교육을 시켜 나갔던 것입니다.
이것을 명품연단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선한 일을 하다가 고난을 당하면 예수님의 본을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죄가 있어 고난을 당하면 빨리 회개하고 돌이켜 벗어나야 하고 부당하게 고난을 당하면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주님을 묵상하면 되지만 자원하여 당하는 고난에 시간에는 예수님을 닮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23절 말씀처럼 욕하지 않으시고 위협하지 않으시고 친히 나무에 달리시고 ....
예수님의 걸어가신 길, 십자가의 길, 섬김의 길, 사랑의 길을 닮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벧전2: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고난을 믿음의 생각으로 살펴보시고 더 나아가서 예수님을 본받아 고난속에서 명품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이 길을 가리라
좁은 문 좁은 길 나의 십자가지고
나의 가는 이 길 끝에서 나는 주님을 보리라
영광의 내 주님 나를 맞아 주시리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일어나 달려 가리라
주의 영광 온 땅 덮을 때 나는 일어나 노래하리
내 사모하는 주님 온 세상 구주시라
내 사모하는 주님 영광의 왕이시라